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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8년 4월 미국 AMAZON 애서 출판된 미국판 한국어버전 '하타 요가 프라디피카'의 백승철 원장의 편집자 서문입니다.
편집자 서문
1992년 내가 만 14세가 되기 전에 서울 강남의 선릉역에서 중국 도가수련에서 파생된 중화양생익지공을 수련하게 되면서 처음 수련세계에 입문하였다. 기공 수련으로 인해 편차(偏差-부작용)를 겪는 사람들을 보면서 기공 수련에 대한 한계를 느꼈고 모든 기공 수련에 처음에 시작하는 일종의 ‘유연공’ - 몸을 부드럽게 하는 동작들 및 운동법 – 을 보면서 요가 동작들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6년에 내 존경하는 라자요가 스승이신 박지명 구루(Guru)를 만나서 북인도 전통의 라자요가를 수련하고 1998년부터 한국요가회를 창립하신 고(故) 김현수 스승을 만나서 하타요가와 요가 테라피를 배웠다. 2003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후 파타비 조이스(Pattabhi Jois)와 아이엥가(Iyenger)의 스승인 크리쉬나 마차리아(Krishnamacharya)의 직계제자인 A.G. 모한(Mohan) 스승과 인연이 되어 스바스타 요가(Svastha Yoga)와 요가 테라피(Yoga Therapy)를 배우게 되었다. 또한 요가를 수련하면서 쿤달리니 각성을 터득하고 싶어 추가적으로 1999년부터 진씨태극권(陳氏太極拳)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2014년에 태극권의 발원지인 중국 하남성 온현 진가구에서 인정받은 진씨태극권 인간문화재로 선정되었다. 결과적으로 북인도와 남인도의 요가와 일본 요가의 선구자인 ‘오키 마사히로(沖正弘)’ 로부터 발전된 한국식 요가까지 3가지 수련법들을 접하게 되었으며 중국 문화의 결정체인 태극권까지 수련하게 된 것이다.
수련을 한지 어느덧 26년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수련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추간판 탈출증, 즉 허리디스크였다. 아마도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절대 수련 인생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미국, 중국, 인도를 넘나들며 올바른 수련법들과 방식들을 알고 싶어 정말로 많은 시간과 노력, 돈을 들여 내 10대, 20대, 30대를 보내고 어느샌가 40대 중년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젠 모든 수련법들이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그 동안 많은 인연들이 있었는데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선생님을 만약 10명을 만나면 진짜 실력이 있는 선생님은 1명 혹은 2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만큼 올바른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올바른 스승 밑에서 수련을 시작하면 누구나 다 눈부신 발전을 이루는 것을 보았다.
요가를 전문적으로 수련하면서 인도 고대 요가 경전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요가 수트라(Yoga Sutra)와 하타 요가 프라디피카(Hatayoga Pradipika),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우파니샤드(Upanishad), 리그 베다(Rig Veda)를 공부하면서 딱 한가지 깨달은 점은 ‘요가는 경전들로 인해 구성되고 만들어졌다’ 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요가 수련법들은 고전에 의거하여 실현된 것만이 진정한 요가이며 고전에 없는 요가 수련법들은 검증되지 않는 수련법들이다.
처음 요가에 입문했을때 내 건강문제로 인해 하타 요가에 굉장히 심취하고 열성이었으며 B.K.S. 아이엥가(Iyengar)의 요가의 빛(Light on Yoga)을 얼마나 열심히 수련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난 아이엥가가 쓴 Light on Yoga 가 하타 요가 프라디피카의 원전인 줄 알았다. 아마 현재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미국으로 이주 후 읽게 된 하타 요가 프라디피카의 원전을 보게 되면서 참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하타 요가 프라디피카를 저술한 스와미 스바트마라마(Swami Svatmarama)가 정리한 하타 요가 동작은 불과 15가지 남짓이고 이 4가지 구절들은 나를 큰 고민에 빠지게 하였다. 여기 하타 요가 프라디키파에 수록된 그 4가지 구절들을 소개한다.
1장 1절
하타 요가는 가장 높은 라자 요가에 이르게 하는 단계이다.
하타 요가는 라자 요가로 가기 위한 준비과정임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너무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하타 요가의 존재 이유를 나타낸다.
1장 3절
라자 요가를 모르고 이론에만 앞서 어둠에서 헤매는 이들을 위해 스바트마라마 요가 수행자는 동정심으로서 하타 요가의 빛을 밝혔다.
4장 79절
라자 요가를 알지 못하고 다만 하타 요가만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내가 고찰하기로는 노력의 결과를 얻지 못하는 수행자들이라 한다
4장 103절
하타 요가와 라야 요가의 과정은 모두 라자 요가를 완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라자 요가에 통달한 사람은 죽음을 극복한다.
처음 요가에 입문한 사람들은 보통 요가 동작들, 하타 요가 아사나들을 요가 수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한국에서 거주할 때는 올바른 요가 교재의 부족으로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교재들은 전부 다 하타 요가 아사나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국에 넘어올 때는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요가 수련한 지 7년차가 되는 시점이었는데 아무래도 미국은 모든 문화들이 자유롭게 공유되고 방대한 자료들이 존재하고 있어서 많은 요가 서적들과 자료들을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원하는 만큼 연구하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다.
이 구절들을 읽고 1996년부터 2003년의 7년의 세월, 특히 하타 요가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나질 않았다. 이 때부터 나는 요가의 ‘고대경전’ 들을 탐구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요가 수트라를 깊게 공부하면서 라자 요가가 진정한 요가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하지만 라자 요가, 즉 명상 요가는 눈으로 특별히 보여지는 것이 없고 스승과 제자간의 일대일 개인지도 혹은 비슷한 수련 레벨을 가진 소수정예를 중심으로 가르침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중화가 어려워서 세간에서 유행하는 요가는 어쩔 수 없이 육체적으로 화려하게 보여주는 하타 요가가 중심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타 요가 프라디피카를 연구하면서 아사나는 고전을 중심으로 최대한 간결하고 개인에 몸에 맞게 수련하는 것이 최상의 아사나임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의 체질이 다르고 연령대가 다르기 떄문이다. 특히 유연성은 체질적으로 타고 나는 부분도 있기에 아사나 수련 목적이 유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증거로 요가 수트라의 저자인 파탄잘리가 이렇게 저술하였다.
요가 수트라 2장 46절
자세는 안정되고 편안해야 한다
자세, 즉 아사나는 본인의 몸에 맞게 안정되고 편안하면 되는 것이다. 아크로바틱처럼 유연하게 하는 것이 아사나의 목적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본인이 60대가 넘어 몸에 여러가지 병이 있거나 유연성이 많이 떨어진 상태이면 20대처럼 유연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내 몸에 맞게 통증을 다스리고 몸을 바르게 정돈시켜 주는, 즉 아사나가 안정되고 나에게 편안함을 주면 그것이 최상의 하타 요가 아사나인 것이다. 만약 아크로바틱한 유연성이 목적이라면 서커스 곡예나 기계체조를 하는 것이 더욱 빠른 길이다.
또한 파탄잘리는 요가의 목적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요가 수트라 1장 2절
요가는 마음의 상태를 통제하는 것이다
요가는 몸이 아니라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요가 수트라 자체는 사실 라자 요가의 핵심적인 명상법을 단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만약 어떤 요가 명상법이 요가 수트라에 없는 것이면 그것은 정통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대 경전들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만약 기독교에는 성경이 없다면 혹은 한의학에 동의보감이 없다면 어찌될 것인가? 동의보감에 기재되지 않은 처방은 정통성이 있는가? 성경에 기록되지 않는 기독교인의 신앙은 옳은 것인가?
그렇다. 고대 요가 경전에 수록되지 않은 수련법들은 대부분 현대에 만들어 졌거나 검증되지 않는 정통성이 없는 것이다. 현대적인 수련방식은 일시적으로 유행을 할 수는 있으나 절대로 오래가지 못한다. 정통수련법의 결과는 10명 중에 10명이 수련하면 그 효과가 평균적으로 다 같으며 비정통수련법의 결과는 10명 중에 3명만 미미한 효과가 있으며 나머지 7명은 효과를 체험할 수 없다. 고전에 검증되지 않은 수련법은 정통성이 없고 그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을 수련한 두 가지 수련법들, 즉 중국의 태극권과 인도의 요가, 이 두 가지 수련법은 상당한 유사점이 많다. 특히 하타 요가는 태극 음양이론과 같다고 보면 된다. 하타 요가의 ‘하’ 는 태양, 즉 양을 나타내고 ‘타’ 는 달, 즉 음을 나타내듯이 태극권의 태극음양도에서도 흑은 음, 백은 양을 나타낸다. 이것은 한국의 국기인 태극기에도 나타난다. 단지 음은 청색을 양은 홍색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하타 요가를 다르게 표현하면 ‘양음(陽陰) 요가’ 혹은 ‘음양(陰陽) 요가’ 인데 여기에 프라티크리야(Pratikiriya) 의 비법이 숨겨져있다. 한번 열면 한번 닫고, 한번 올라가면 한번 내려가고, 한번 왼쪽으로 돌면 한번 오른쪽으로 돌고 – 이렇게 음과 양이 조화되어 아사나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태극권에서 추구하는 음양 평형도 이것과 다르지 않다. 일반적으로 태극권도 느리고 부드럽게만 ‘음’ 의 성질만을 수련하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반쪽짜리 태극권이다. 그 이유는 태극음양도를 보면 분명 흑과백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같은 원리와 이론으로 강하고 빠른 태극권의 ‘양’ 적인 수련법도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원리를 실천하는 이는 적다. 마찬가지로 수련자가 단 한번이라도 하타 요가 프라디피카나 요가 수트라를 읽어보면 수련의 방향과 요가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올바른 교재를 편찬하는 것은 지도자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다. 그리고 가감없이 전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 하타 요가 프라디피카를 편집하면서 다시 한번 박지명 스승의 섬세한 번역과 작업에 참으로 감동하고 경탄하였다. 제자로서 스승님의 작업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참으로 행복하고 기쁘게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요가 수련자들이 하타 요가의 목적은 무엇이며 라자 요가를 왜 수련해야 하는지 꼭 알았으면 한다. 라자 요가를 실제적으로 제일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경전은 마하리쉬 파탄잘리가 저술한 ‘요가 수트라’ 이며 이미 박지명 구루와 내가 한국어 작업을 마친 상태이다. 하타 요가는 라자 요가를 위한 것임을 잊지 말라.
진정한 요가는 종교를 초월하고 모든 성별과 연령을 뛰어넘는다. 마치 아주 유명한 쉐프가 만든 정말 맛있는 음식과 같은 것이다. 만약 누군가 요가를 힌두교나 불교의 색깔을 입혀 가르친다면 그 사람은 요가 경전들에서 말하는 요가의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요가는 힌두교가 아니다. 그 이유를 최대한 간단히 설명해보겠다. 요가의 발원지인 인도는 카스트(Caste)제도가 뿌리 깊은 나라로 역사적으로 네 가지의 계급제도<수드라(Shudra)-노동계급, 바이샤(Vaisha)-상인계급, 크샤트리야(Kshatriya)-군인계급, 브라흐민(Brahmin)-성직자계급>로 세분화되어 철저하게 국가를 지탱해왔다. 천민계급인 수드라가 본인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딱 한가지의 이론이자 신념은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현생에 이렇게 천하게 태어났구나’ 이다. 그리고 승려계급인 브라흐민은 ‘전생에 덕을 쌓아 귀하게 태어났구나’ 이다. 이런 풍토가 인도를 지배해 왔고 근대에 카트스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그 영향이 남아있다. 이것은 마치 한국의 예전 양반/상놈 제도와 같다.
또한 시바신은 제일 쉽게 설명하면 자연신, 마치 한국의 단군설화와 같이 인도전역에 뿌리내린 일종의 토속 신앙이다. 한국인에게는 단군신화는 문화의 한 부분이며 신화로 여겨지는 일종의 드라마 소재처럼 거부감이 크게 없을 것이지만 외국인들의 눈으로 보면 이상한 이단 종교처럼 보일 수 있다. 이와 같이 영어권 국가나 서구사회에서 바라보는 인도의 요가는 힌두교 그 자체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리그 베다나 우파니샤드를 보면 분명 인도의 전통문화인 시바(Siva)신과 파르바티(Parvati), 전생과 후생, 카스트제도가 그 밑바탕이 깊게 깔려있으나 수행적인 측면만을놓고 보면 오로지 ‘테크닉’ 적인 것들, 즉 기술적인 것들만 나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본인의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요가를 망설인다면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요가 수련은 인도의 전통 음식인 카레처럼 생각하면 아주 쉬울 것이다. 음식과 신앙은 전혀 관계가 없듯이 요가를 심신에 활력을 주는 건강한 유기농 인도카레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카레에 양파가 들어가는 것이 싫으면 그걸 빼고 먹으면 된다. 이 같이 요가를 수련할 때 본인의 종교와 대립대는 것이 있거나 걸리는 것이 있으면 그것만 빼고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만들어 먹으면 되는 것이다. 심신이 건강하면 본인의 종교활동과 신앙에 더욱 활기를 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가는 힌두교 혹은 종교가 아니다. 단순히 인도에 그 역사와 뿌리를 둔 수 천년 동안 내려온 검증된 수련법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하타 요가만을 최고라고 생각하고 수련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하타 요가 프라디피카의 4장 79절을 상기시켜주고 싶다.
4장 79절
라자 요가를 알지 못하고 다만 하타 요가만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내가 고찰하기로는 노력의 결과를 얻지 못하는 수행자들이라 한다
하타 요기는 반드시 라자 요가를 수련해야 한다는 권고이자 경고이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라자 요기라도 하타 요가를 등한시 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만약 몸에 많은 통증과 병이 있다면 어떻게 장시간을 앉아서 명상수련을 할 수 있겠는가? 라자 요가는 하타 요가를 포함하고 있으며 하타 요가는 라자 요가의 일부분이다. 1장 67절과 2장 76절을 보면 라자 요가의 수행 결과를 위해 반드시 하타 요가를 수행해야 한다고 분명히 나와 있다. 다시 말하면 라자 요기도 반드시 하타 요가를 수련해야 하는 것이다.
1장 67절
다양한 아사나나 호흡법 그 밖의 훌륭한 행법등 하타 요가의 모든 수행을 라자 요가의 결과인 삼매에 이를 때 까지 계속해야 한다
2장 76절
하타 요가가 없으면 라자 요가에 성공할 수 없고 라자 요가가 없으면 하타 요가도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라자 요가에 성공할 때까지는 이 한 쌍의 수행을 바르게 해야한다.
부디 이 하타 요가 프라디피카 한국어판을 통해 아사나의 목적을 알고 왜 하타 요가는 라자 요가로 가는 다리(Bridge) 인지 반드지 숙지하길 바라며 조금이나마 진정한 요가를 수련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2018년 2월 2일
엘에이(L.A.) 에서 백승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