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GA SUTRA 요가 수트라

이 글은 2018년 4월 미국 AMAZON 애서 출판된 미국판 한국어버전 '요가 수트라'의 백승철 원장의 편집자 서문입니다. 

*****************************************

편집자 서문

나의 라자 요가(Raja Yoga) 스승이신 박지명 구루(Guru)를 1996년 안국동의 ‘히말라야 명상요가 센터(Himalaya Meditation and Yoga Center)’에서 처음 만나 어느덧 라자 요가와 스승님과의 인연을 맺은 지가 올해로 벌써 22년째가 되었다. 이 미국판 한국어 ‘요가 수트라(Yoga Sutra)’ 를 출판하자는 것을 내가 제안하였으며 이 작업에 참가하게 된 것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는 바이다. 여기 간단하게 편집자이자 박지명 구루의 오랜 제자로서 간단히 글을 남기고자 한다. 요가에 입문한 초보자나 중급자 그리고 고급 수련자들에게 분명 이 글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카스트(Caste) 제도와 윤회설과의 관계

인도에는 인도의 사회적인 근간을 이룬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 있다. 수드라(Shudra-천민), 바이샤(Vaiçya-상인), 크샤트리야(Kshatriya-무사), 브라만(Brahman-성직자)의 4계급이 그것이다. 과거 한국의 양반과 상놈과 같은 제도인데 더 세분화되었다고 생각하면 쉽다. 먼저 한국의 양반제도를 생각해보자. 만약 양반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상놈, 즉 천민들은 교육 뿐만이 아니라 여러 기본적인 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었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는 예로부터 카스트 제도가 형성이 되어 사회구조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만약 태생이 브라만과 같은 귀족이거나 혹은 수드라와 같은 천민이면 ‘전생(前生)에 무슨 업보(業報)로’ 라는 사상이 뿌리깊게 인도인의 사상에 고착 된다. 이것이 힌두교와 직결되는 ‘전생, 업보, 윤회(輪廻)’ 의 사상의 근간인 것이다. 힌두교의 사상과 불교의 사상은 유사한 점이 많은데 당연히 이 두 종교의 발원지가 인도이기에 유사성이 많으며 카스트 제도가 오랜 세월을 지나 발달한 인도에서는 어찌 보면 전생과 윤회설만이 현생에 태어난 천민들에게는 제일 납득할 만한 ‘세상에 이렇게 태어난 이유’ 였을 것이다. 즉, 금수저로 태어나면 전생에 덕을 쌓아 현생에 그 복을 받으며 흙수저로 태어나면 전생에 업보가 많아 현생이 괴롭다는 것이다. 


1940년대 말에 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불법화 선언을 했고 많이 개선이 되었지만 여전히 카스트제도의 오랜 영향이 남아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유명한 브라만 귀족 계층의 이름의 성(姓-Last name)만 들어도 일반인들이 알 정도이다. 이러한 뿌리깊은 카스트 제도의 이유로 인도에는 ‘전생과 윤회’ 가 기본적인 사상이며 이러한 것들은 요가 수트라 뿐만이 아니라 베다(Veda) 그리고 기타 다른 경전에서도 자연스레 뿌리깊게 형성이 되어있다. 


요가(Yoga)는 종교인가?

앞서 간단하게 설명한 것처럼 요가의 발생지인 인도는 힌두교와 불교의 본산이기에 파탄잘리(Patanjali)의 요가 수트라(Yoga Sutra)도 힌두교의 정신과 철학이 담겨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어 요가에 관심이 있으나 이 책을 보기가 꺼려진다면 인도의 대표 음식인 ‘인도 카레(Curry)’ 를 생각해보자. 

카레는 인도의 음식으로 누구나 다 종교에 관계없이 기호에 따라 변형시켜 요리하여 즐길 수가 있다. 기독교인도, 무슬림도, 불교인도 기타 다른 종교인들도 본인이 만약 카레를 좋아한다면 분명 거리낌없이 먹을 것이다. 요가는 인도 카레와 같다. 요가 경전을 읽으면서 본인의 종교적 사상과 대립되는 것이나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타국의 음식 중 입맛에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만 음식처럼 가져가면 되는 것이다. 한국 전통 음식인 김치에서 분명 강한 마늘 향이 나듯이 모든 인도 요가 경전들 및 전통 서적들을 공부하면 분명 힌두교 혹은 인도 고전적인 철학들이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몇 년 전에 엘에이(L.A)에서 어떤 기독교 목회자 분이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요가는 사탄이 수련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요가 동작 중에 ‘뱀 동작’ 및 동물 이름과 형상을 딴 수련을 하기 때문에 이단적인 것이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을 들으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인이 인도 카레를 먹는다고 해서 이단으로 불리울까? 그럼 교회에서 주일에 단체로 음식을 나눌 때 흔히 쉽게 먹을 수 있는 인도 카레를 절대로 신자들에게 먹여서는 안 될 것이며, 그렇다면 이 목회자는 절대 인도 카레를 평생 먹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먹었다면 그 목회자는 이미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가? 분명 아니다. 음식과 종교적 신념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요가 수련은 사람이 사는데 있어 음식과 같이 필요한 존재로 심신의 조화를 위해 고대 인도로부터 전해져 온 약 5천년의 역사가 있는 검증된 수련법일 뿐이다. 


이것을 상식적으로 따져보자. 몇 천년전의 고대인들은 현대에 가지고 있는 과학적인 개념이 없었으며 자연을 무서워하고 경외하였다. 그리고 수 많은 자연의 위대함과 동물들과 함께 살았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을 철수 혹은 영희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처럼 요가 동작인 아사나(Asana)가 발생하고 발전되었을 때 고대 요가수행자인 요기(Yogi)들은 반드시 동작들을 구분하고 분별할 수 있는 ‘이름’ 즉 고유명사가 필요했으며 여러 동작들을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로 이름 지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다리와 팔을 동시에 쭉 늘려주며 머리를 아래로 숙이는 동작은 마치 개가 기지개 켜는 것과 같은 모양이어서 ‘개가 기지개 켜는 자세’ , 상체를 위로 크게 올리는 자세는 마치 뱀이 고개를 드는 것 같다 하여 ‘코브라 자세’, 혹은 다리를 좌우로 벌려 골반을 늘려 주는 것은 마치 원숭이가 나무를 탈 때 하는 동작과 같다고 하여 ‘원숭이 자세’ 등등 많은 동작들을 동물들의 움직임과 비교하여 작명하였다. 사실 이 동작들은 요가 뿐만이 아니라 현대 무용 및 체조에서도 존재하며 단지 그들은 요가 동작이라고 부르는 것 대신에 ‘스트레칭(stretching)’ 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다른 예로 중국의 소림권(小林拳)과 같은 전통 무술은 호랑이 모습을 본 뜬 ‘호형권(虎形拳)’ 그리고 학처럼 우아한 동작으로 구성된 ‘학권(鶴拳)’, 뱀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권법을 ‘사권(蛇拳)’ 등 이라고 부르며 중국 역시도 많은 동물 이름을 딴 권법(拳法)들이 존재한다. 그럼 기독교인은 중국 무술 중 동물들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수련할 수 없는가? 만약 요가나 혹은 중국 무술을 수련하는 기독교인들은 다 이단인 것인가?


종교와 관계없이 요가 수련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으며 만약 요가를 힌두교 자체로 치부하여 그렇게 몰아가는 것은 굉장히 낮은 의식의 소유자일 것이다. 종교적인 이단이라는 것은 본인의 종교적 신념과 반대되어 그 신념과 사상을 송두리째 밑바닥부터 흔드는 것들이 이단(heresy)이지 어떤 육체적인 체조나 호흡, 혹은 마음을 편하게 하고 집중시켜주는 명상 수련법들은 이단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심신을 조화롭게 해주어 종교활동에 도움이 된다.  


본인의 종교적 신념 그리고 현대적 사상에 맞지 않는 것들이 요가 경전에서 발견되면 그것을 참고만 하면 되는 것이고 요가를 본인의 삶에 활력을 주는 음식 혹은 비타민처럼 활용하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전통 문화 역사 책에 ‘양반은 상투를 틀고 갓을 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자. 자, 이것을 현대에 적용 시킬 수 있는가? 이렇듯 요가 고전들에 명시되는 어느 부분들은 이 ‘상투’ 와 같은 개념들이 분명히 있으며 현대 과학이나 철학에 반영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 같은 예처럼 인도 고전의 요가 경전들을 대할 때에도 이런 부분들은 당연히 존재하며 상식적인 선에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혼자 경전을 해석하는 것보다는 충분한 검증을 받은 지도자 또는 구루(Guru)에게 확실한 해석과 답을 찾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요가는 오랜 시간을 걸쳐 인도에서 발생된 약 5천년의 역사를 가진 검증된 수련법이고 오랜 카스트 제도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힌두교와 불교의 근간이 되는 전생, 윤회설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는 받아들이기 나름이며 종교랑 무관하게 순수한 요가적인 기술, 즉 테크닉적인 부분만을 수련하는 것이 대중적이고 보편화된 요가 수련법이다. 


더 쉽게 풀어보면 요가는 8가지 영역의 수련체계에서 크게 3 부분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아사나(Asana), 프라나야마(Pranayama), 디야나(Dhyana)가 그것이다. 아사나에서는 몸을 각 부분을 풀어주고 늘려주는 스트레칭 동작을 배우는 것이고, 프라나야마는 몸의 신경체계와 순환계통을 활성화시키는 세밀한 호흡법을 배우며, 디야나는 명상이라는 마음을 쉬게 해주는 방법을 통해 마음을 편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없애주는 수련법인 것이다. 이 부분들은 온전히 기술적인 것으로 어떠한 종교적인 색채가 있어서도 안되며 단지 수련자가 본인의 이해력과 선택에 따라 수련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면 요가의 방향이 정해진다. 만약 수련자가 요가 동작을 위주로 수련하면 그것은 하타 요가(Hata Yoga)이고, 명상을 위주로 수련하면 라자 요가(Raja Yoga)이다.


박지명 구루의 요가수트라

돌이켜보면 내가 요가 입문할 당시 나는 10대였고 추간판 탈출증으로 인한 다리와 허리 통증이 심했기에 하타요가에 심취하였으며 몇 년 만에 내가 원하는 성취를 이루었다. 이후에 전문 요가 지도자가 되어 수 년이 지나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를 읽게 되면서 요가수트라가 단 한번 ‘아사나’ 대한 언급만을 할 뿐 아무런 동작이나 자세에 대한 정보가 나와있지 않아서 당황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하타요가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하타요가 프라디피카(Hata Yoga Pradipika)’ 를 읽게 되면서 더욱 더 혼동이 되었다. 그 이유는 ‘하타요가 프라디피카’ 의 원전(原典)에 나온 하타 요가 동작들이 고작 20개 남짓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 ‘요가수트라’ 와 ‘하타요가 프라디피카’ 의 몇 구절을 소개하니 만약 당신이 요가 수련자라면, 특히 요가 전문 지도자라면 이 구절들을 읽고 깊게 묵상하며 스스로에게 문답하길 권한다. 


하타요가 프라디피카 1장 1절: '하타 요가는 가장 높은 라자 요가에 이르게 하는 단계이다'


하타요가 프라디피카 1장 1절: '라자 요가의 성취를 위해서 하타 요가의 가르침을 펼쳤다'


하타요가 프라디피카는 정확히 하타요가의 목적을 설명해주는데, 1장 1절과 2절에 모든 것이 명쾌하게 나와있다. 하타요가는 라자요가의 성취를 위해서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하는 수행으로 라자요가를 보조하기 위해 정리된 것이라는 것이다. 즉, 라자요가가 하타요가보다 높은 단계이며 라자요가를 돕는 것이 하타요가인 것이다. 


요가수트라 1장 2절: ‘요가는 마음의 상태를 통제하는 것이다.’


요가수트라 1장 17절: ‘유상삼매는 네 가지가 있는데 관찰, 분별, 희열, 개별적인 자아가 있다.’


요가수트라 1장 2절은 요가수트라를 정의하는 것으로 요가는 몸이 아닌 ‘마음’ 을 통제하는 것으로 파탄잘리가 정확하게 기술하였다. 그리고 1장 17절에 유상삼매에 대해 풀어주고 있는데 이 구절만 보아도 요가수트라는 하타요가가 아닌 ‘라자요가’ 를 설명하고 있음은 너무나 명백하다. 

또한 ‘유상삼매’ 를 말하고 있는데 당신은 ‘삼매’ 를 아는가? 삼매는 이루기 어려운 것인가? 올바른 라자요가를 만나 수련하면 누구나 다 삼매를 경험하는데 단지 수행의 깊이와 차이에 따라 삼매의 상태가 달라질 뿐 결국은 그것들은 다 삼매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3명이 사과를 먹었는데 첫번째 사람은 ‘사과가 달다’ , 두번째 사람은 ‘사과가 시다’ 그리고 세번째 사람은 ‘사과가 달고 시다’ 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자, 무엇이 다른가? 3명다 같은 사과를 말하는데 표현력이 다를 뿐이다. 요가수트라는 반드시 정확한 계보(系譜)나 법맥(法脈)을 이었거나 그리고 그것을 실천적으로 체험한 구루가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요가수트라 1장 29절: ‘이러한 수행으로 모든 장애가 사라지면, 그 결과 내적인 참나에 대한 지혜가 일어난다.’


요가수트라 2장 11절: ‘고통의 작용인 생각의 움직임은 명상을 통해 고요함으로 들어간다.’


많은 이들이 1장 29절, 그리고 2장 11절의 구절들을 대부분 많이 오역하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보통은 이 구절들을 힌두교의 가르침이라고 알고 있으나 그것이 아니다. ‘참나’ 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인지하고 자각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당신에게 이 2가지 질문들을 해보자. 


1. ‘당신은 꿈이 무엇인가요?’

2. ‘당신의 꿈과 현재 직업이 같습니까?”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1번과 2번의 답이 같은가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내 꿈과 현재 내 직업은 다릅니다’ 라고 답할 것이다. 이것을 이 구절들과 연결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하고 싶은 꿈과 직업을 다르게 가지고 살고 있는데 이것은 ‘참나’ 를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주변을 보자. 보통 40대가 넘을 때까지 돈을 위해 현실과 타협해 살아가면서 40대쯤 인생을 알고 본인의 생활과 꿈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 때쯤 ‘내가 하고 싶은 일’ 을 찾아갈 때 쯤이 40대의 인생이다. 즉, ‘참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결국 우리 인생들도 파탄잘리가 정의한 수트라 구절들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이것은 단지 예를 든 것일 뿐, 일찍이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찾아 실천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다.


2장 11절에는 사람의 고통의 작용은 생각의 움직임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그 생각의 끝없는 움직임을 명상을 통해 고요하게 해야 한다고 수행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생각의 움직임은 깨어 있을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항상 이루어진다.  


개인적으로 제일 싫어하는 명상에 대한 표현은 ‘마음을 비워라’ 혹은 ‘마음을 내려놓아라’ 와 같은 것인데 사람이 살아있는 한 절대로 마음을 비울 수 없다. 직접적인 예를 들어보자. 오늘 당신이 만약에 직장에서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치자. 아마 수면 중 악몽을 꾸거나 혹은 수면 장애가 올 수 있다. 이것이 제일 직접적이고 쉬운 마음 작용의 예이다. 사람은 잘 때에도 마음의 작용, 즉 생각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활동하는 것이다. 명상(冥想) 이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생각을 어둡게 하다’ 라는 뜻인데 명상 수행을 통해 복잡한 생각의 상태나 지친 마음을 ‘쉬게 하는’ , 다시 말하면 명상의 올바른 정의는 마음을 진정으로 ‘휴식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라자요가 수행의 첫 걸음인 아자파자파(Ajapajapa)를 하면 보통 수면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나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명상 중 몇 분만 지나면 바로 수면 상태로 들어가거나 명상 후 시체자세 중 깊은 숙면을 취하는데 이것은 명상을 통해 심신이 깊은 휴식을 하여 깊은 이완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명상들은 어떤 사물이나 감정 혹은 스스로를 지켜보는 관법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마치 초등학생이 대학교 수준의 공부를 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마음의 상태는 제 각각 다른 상태로 두리 뭉실한 어떤 대상을 명상하는 것보다 마치 낚시 할 때 미끼로 물고기를 유인하듯이 특정한 ‘미끼’ 를 사용해 마음의 불안정한 상태와 굉장한 에너지를 가지고 변화하는 감정들, 그리고 끊임없는 생각의 움직임을 특정한 만트라(Mantra)를 통해서 낚아올리는 것이 제일 쉽고 제일 효과적인 수련이다. 이런 노하우들이 현대에 유행하는 명상법들과 요가수트라에서 파탄잘리가 남긴 명상법의 차이점이다. 고전에 기록되지 않은 명상법들은 그 뿌리가 불분명하여 검증되지 않아 부작용이 있으며 가르치는 선생들마다의 해석과 체험이 제 각각이라서 많은 수련자들이 혼동하기 쉽다. 


경전에 기록된 명상법들 이야말로 역사적으로나 수련적으로 아주 정확하게 불필요한 오류 없이 모든 수련자들이 안전하게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요가수트라 2장 29절: ‘하지 말아야 될 것, 지켜야 할 것, 자세 행법, 호흡법, 감각 통제, 집중, 명상과 삼매는 요가의 여덟 가지 영역들을 구성한다.’


요가수트라 2장 46절: ‘자세는 안정되고 편안해야 한다.’


요가수트라 2장 29절은 아쉬탕가요가 <파타비 조이스(Pattabhi Jois)의 ‘아쉬탕가(Ashtanga)’ 하타요가가 아님, 아쉬탕가는 산스크리트로 ‘8’ 을 뜻함> 를 정의하는데 8가지 수련영역과 법칙을 설명하는 것이다. 보통 일반 수련자나 지도자들은 아사나(Asana-요가 동작) 과 약간의 프라나야마(Pranayama)의 호흡법만을 알 뿐, 상위 단계인 프라트야하라(Pratyahara-감각통제), 다라나(Dharana-집중), 디야나(Dhyana-명상), 사마디(Samadhi-삼매) 를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요가 비지니스가 눈으로 잘 보여지는 하타요가에 치중이 되어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때문이며 인도에서 정통계보를 이어받아 라자요가를 수련하는 지도자나 구루를 만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2장 46절은 딱 한번 파탄잘리가 요가 동작, 즉 자세 행법 아사나에 대해 기술하는 구절인데 여기를 보면 ‘자세를 편안하게 하라’ 고만 나와있다. ‘몸을 유연하게 하라’ 라는 구절은 없다. 이것을 정확히 풀이하면 본인 몸 상태에 맞게 자세를 안정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사나라는 것이다. 만약 내 몸이 허락되지 않으면 무리하게 아사나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신의 타고난 유연성과 필요에 따라 아사나는 달라지며 내 몸이 50대 이상의 유연성이라면 굳이 20대의 유연성이 필요한 아사나를 무리하여 완성하려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타요가를 오랜 수련한 사람으로서 반드시 알리고 싶은 것은 하타요가는 분명 ‘한계’가 존재하며 몸의 노화가 올수록 아사나를 필요한 것만 압축하여 본인에 몸에 맞게끔 디자인하여 개인화 시키는 것이 최상의 아사나의 연속 동작인 시퀀스(sequence)이다. 


요가수트라 3장 2절: ‘마음의 집중이 한 대상에 연속적으로 모아져서 명상이다.’


요가수트라 3장 4절: ‘세 가지인 집중, 명상, 삼매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을 삼야마라고 한다.’ 


몸을 아사나로 정돈하고 호흡으로 프라나를 일으켜 쿤달리니를 일깨우며 전통적인 명상 수행을 통해 자연스러운 감각 통제(프라트야하라) 와 집중(다라나) 가 이루어지면 그것이 명상이 된다. 아자파자파(Ajapajapa)와 같은 호흡명상 수련법과 순수한 소리를 명상하는 비자 만트라(Bija Mantra)가 라자 요가의 길로 이끄는 제일 좋은 수련법으로 깊은 마음의 긴장을 풀고 이완을 하게 해주어 ‘고요함’ 그리고 ‘휴식’ 이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깨닫게 한다. 이런 명상의 효과를 느낀 요기들은 하타요가에서 찾지 못한 마음의 평안을 느끼게 되며 라자요가가 왜 최상의 ‘왕도의 요가’ 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단, 라자요기들은 하타요가를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하며, 일반적인 하타요기들은 라자요가의 명상수련법을 알지 못하므로 육체적인 아사나 시범을 통해 본인의 수련목적과 만족감을 얻으려 하는 경향이 있으나 몸이 아무리 유연하고 강해도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삼야마(Samyama)는 라자요가의 핵심적인 명상수련으로 요가수트라에서 제시한 순차적인 명상법을 구루가 제자를 통해 직접 일대 일로 수련을 관찰하고 전수하는 방식이므로 대중화가 어려우며 끈기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수련들이 대부분이므로 보통 실전(失傳)으로 잃어버렸거나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삼야마를 아는 자는 라자요가를 아는 사람이다. 


요가수트라 4장 10절: ‘살려는 욕망이 영속적이기 때문에 잠재된 인상의 행위도 계속해서 존재한다.’


요가수트라 4장 19절: ‘마음은 스스로 알지 못한다. 그것은 참나에 의해 알려지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요가수트라의 마지막 장인 4장에서는 육체를 가진 인간의 욕망과 그에 따른 행위의 결과를 지적하고 있으며 마음의 본질은 진정한 참나인 아트만(Atman)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정의한다. 바른 라자요가 수련으로 누구나 다 삼매에 이를 수 있으며 참나를 아는 것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고 생활방식과 태도를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 긍정적이고 활동적이게 변하는 과정이다. 쉽게 말하면 ‘행복’ 하게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라자요가의 길인 것이다. 


자 여러분은 방금 요가수트라의 몇 구절들을 읽어보았다. 그 동안 당신의 요가 수행에서 이 구절들이 있었는가? 만약 이 구절들이 당신의 마음을 뜨겁게 했거나 어떤 감동이 있었다면 그 이유는 이 구절들의 요가의 법칙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파탄잘리가 기술한 요가 수트라는 현존하는 모든 요가 수행체계를 제시한 요가의 척추이며 제일 실천적인 수행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대부분 하타요기이며 육체적인 아사나만을 목표로 더욱 유연하고 강하고자 하는 목적을 두고 있다. 과연 이것이 혹은 하타요가가 진정한 요가인가? 몸을 유연하게 하는 방법은 요가 수련이외에도 현대 기계체조나 서커스의 곡예 같은 비트는 것(contortion)이 요가 아사나보다 더욱 유연하고 강한 퍼포먼스를 가지고 있다. 만약 당신이 육체적인 유연성과 강함을 요가라고 알고 있다면 혹은 그것이 당신의 요가의 목표라면 요가에서 찾는 것보다 이 현대적인 수련법을 하는 것이 더욱 빠른 지름길이다. 


박지명 구루의 요가수트라는 산스크리트 원전에 충실하며 故 이서경님의 산스크리트 작업의 도움으로 그 완성도가 높다. 이것은 한국의 요가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것으로 개인적으로 미국 출판을 위해 몇 가지 구절들을 구루의 허락 하에 미국 실정에 맞게 편집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로부터 기인한 전생과 윤회설과 요가 철학에 대한 것은 스스로 분별 있게 인식하여 받아들이기 바란다. 인도의 카레처럼 생각하라. 


마지막으로 박지명 구루의 요가 수트라가 한국 요가인들에게 빛이 되어 올바른 길로 안내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8년 1월 10일 

엘에이(L.A)에서 백승철